6.25 사변과 떡 장사 이야기 / 글 이 용 구 벌써 아득한 옛 이야기로 약 60여년전 일이 떠 올라 이글을 쓰는것은 내가 아직 오래 살아서 이고 내가 죽으면 누구도 모르는 우리 집안의 이야기 한토막이다 1950.6.25가 시작되자 모두들 시골에 사는 친척집 등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시골인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의 살던 큰 누님이 급기야 조카 3인을 데리고 시골인 우리집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전세는 기울어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 되어 북으로 북으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 갔으나 중공군이 가세하는 바람에 다음해 1월 다시 1.4후퇴라는 비극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 세력은 평택을 기점으로 역전 되어 후퇴하기 시작하여 북으로 3.8선 넘어로 까지 밀어 올라가는 와중에 우리집은 수복 탈환 폭격으로 나의 아버지와 누님이 데리고 온 두살 배기 조카 그리고 우리집에 피난차 묵고 있던 아버지 친구의 부인등 한집에 3명이 폭사 하고 집 일부가 파괘되고 말았다 게다가 식량은 떨어져 끼니가 간데 없었다 당시 내 것이 없으년 굶어 죽을 처지에 연일 밀가루 수제비 아니면 죽을 쑤어 연명했다 시일은 지나가 깊은 겨울이 지나 어김없이 1951년 봄이 되었다 전쟁은 계속되어 3.8선 주변에서 격전중에 있었으며 서울의 피난민은 한강 도강(渡江)이 안 풀려 대기 상태로 안양역전과 시장 거리 주변은 온통 피난민이 운집해 서울수복 도강이 허용 해제되기를 기다리며 피난민들이 임시로 운집한 시장이 형성 되었다 그때 식량은 떨어져 막막한 처지에 무슨 방도를 강구 해야 하는 시점에서 누님이 생각 해 낸 것이 한푼 이라도 벌겠다는 것이 떡 장사였다 집에 조금 남아 있는 쌀에 쑥을 섞어 어머니는 쑥 떡을 만들고 누님은 그것을 양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나가 시장의 먼지 바람을 맞아가며 해가 서산에 넘어 가도록 팔았다 그러나 처음 해 보는 떡 장사인 누님이라 수 줍어 그런지 몇일이 지나도 그리 수입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시장에 가서 여러 떡 장사들의 실태를 본 결과 한가지 내 생각이 떠 올랐다 그것은 당시 모두들 굶주림의 시기라 사는 사람은 여러 떡을 이리저리 비교하여 조금 이라도 큰 떡을 사겠다는 심리를 착안한 것이 박리다매(薄利多賣)였다 어머니계 말 하여 떡을 좀 크게 만들었더니 그날 부터는 종전에 비해 속이 다 팔수 있었고 누님은집에 일찍 돌아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부터는 매상이 오르는 동시에 수효를 늘여도 다 소비하게 되었으며 그후 많은 도음을 받게 되었다 다음은 나는 두살 배기 아들을 데리고 세 식구가 그 고역을 벗어나 그해 1951년 8월경에 부산으로 이사해 부산시 동래구 거제동 철도관사에서 살며 근무했다 역시 부산에도 전시중 이라 피난 살이로 있었는데 정부에서 주는 월급과 쌀 배급으론 도저히 살수 없어 부업으로 아내가 떡 장사를 하겠다 했다 당시 같이 피난 온 직장동료 주변 들의 부인들이 대거 여러 수입을 위해 나 선다는 터라 하기에 나는 고마운 생각으로 허락을 했다 아내는 떡 집에서 떡과 찐 빵을 받어 들고 게다가 어린 자식을 등에 업고 관사 주변인 동래.서면 등지로 이리저리를 오락가락 하며 수일을 위해 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내게 말 했다 떡 장사 수입은 있으나 장사를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무르니 여러 유혹이 있어 조심 스럽고 불안하고 더럽다는 것이었다 피난중 동정은 커녕 유혹을 하다니....세상은 이런 것이었고 내가 생각한 예상 대로였다 젊은 들머리 떡 장사라니..말도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다음 날부터 걷어 치우고 말았다 그러나 그후 아내는 한가지 구실이 생긴 것이다 정부 서울수복후 나는 서울 용산 철도관사에서 살았다 간혹 부부싸움 이라도 하게 되면 아내는 꼭 부산 피난 당시의 떡 장사를 내 세워 대 드는 판에 내가 꼭 져 주기만 하였는데 그 나마 이젠 아내와 사별 한지도 어언 16년이 된 아내의 피난 당시떡 장사의 모습과 동시에 피난시절 떡 팔던 누님의 모습 회고와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요즈음도 간혹 거리의 들머리 영세 떡 장사를 볼때 마다 떡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며 떡 한팩 이라도 팔아 주고 싶은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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