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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철우회원 유적지 답사 리포트
철우회 조회수:656
2014-05-15 16:14:21
2014 봄 유적지 답사를 조용하게 다녀왔다. 생명의 녹색봄기운이 넘치는 5월, 철우회원의 봄나들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침 9시 최고령 김성락 회원(93 차량동우회)을 비롯하여 사단법인 철우회(회장 김시원)는 회원 130여명이 버스 3대에 분승, 경기도 여주지역으로 봄 유적지 답사를 떠났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애도와 유가족의 슬픔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에 경건하고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1호차에는 김시원 회장, 2호차에는 정구섭 본부장, 3호차에는 이근국 부회장이 탑승하여 승  하차, 인원 점검 등 무엇보다도 회원의 안전한 여정을 위한 배려였다. 이날 행사는 서동철 관리본부장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실무 작업은 김학로 처장과 (사)철우회 상근직원들이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장소 헌팅, 음식, 코스 체크 등 약 2달 전부터 기획하고 준비했다. 오늘도 전 직원이 일찌감치 나와서 참가자 안내, 생수를 비롯하여 회원들이 오가며 먹을 간식을 버스에 나눠 싣는 등 부지런히 움직였다. 서울을 벗어 난 버스는 이내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자연, 산과 들에는 온통 푸른 물결로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먼 산에는 아카시아가 피었고 논에는 이미 모내기를 하여 파릇파릇 벼들이 한창 자라고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잠시 쉬었던 버스는 오전 11시 경 명성황후 생가에 도착했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2) 음력 9월25일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 (지금의 여주읍 능현리 250-2)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민치록(閔致祿) 1799~1858 추증 영의정, 여성부원군, 시호는 순간(純簡),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5대 손으로 자는 원덕(元德)이다. 벼슬은 1830년(순조30) 참봉을 시작으로 과천현감 (종6품), 임피현령(종5품),덕천군수(종4품),장악원 첨정(僉正 종4품)을 거쳐영천 군수(종4품)에 이르렀다. 여주읍 능현리에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가 있다. 종손인 민치록은 이 묘를 지키며 묘막에서 살다가 명성황후를 낳았다. 명성황후의 생가이기도 한 이 묘막은 1687년(숙종13)에 지었는데 그동안 쇠락하여 27평만 남았던 것을 1995년 여주군에서 58평 규모로 복원하였다. 명성황후의 공부방이 있던 자리에 서있는 碑에는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 明成皇后誕降舊里,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마을)」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광무팔년갑진오월배수음체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拜手飮涕敬書, 광무8년 갑진 오월 어느 날 손을 들어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경건히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고종의 친필이라고 전하나 뒷면에 쓰인 글의 내용과 글씨체로 미루어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이 썼다고 보아야 한다. 민치록 일가가 언제까지 여주에서 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안국동에 있었던 감고당에서 1858년(철종9) 9월 17일 민치록이 사망하였으므로 명성황후가 7~8세까지 능현리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감고당(感古堂 서울시 안국동 36번지, 지금의 덕성여고 자리)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으로 희빈 장씨의 모함을 받아 폐위된 후 5년(1689~1694)동안 유폐되어 있던 곳이다. 그 후 여흥민씨 종중에서 관리하면서 여양부원군의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민치록은 말년에 여주에서 옮겨와 이 집에서 살았다.  1895년(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당하기까지의 일생(44년)은 생가, 기념관, 감고당, 민가마을, 문예관 등에 잘 보존되어 있었다. 명성황후 유적지를 돌아본 회원들은 여주의 교리여주쌀밥 등 식당으로 이동, 시원한 막걸리를 곁들여 점심식사를 맛있게 했다. 여주가 자랑하는 쌀, 노란 빛의 강황곡미로 한 쌀밥은 별미로 더욱 입맛을 돋웠다. 점심을 마친 회원들의 유적지 답사는 천년고찰, 신륵사(神勒寺)로 이어졌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甓 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부속 건물로 구룡루(九龍樓) ·명부전(冥府殿)·십왕전(十王殿)·산신당·육각정 등이 있다. 신륵사의 또 다른 보물, 600년 된 버드나무와 향나무가 떠나가는 철우회원들을 말없이 배웅했다. 마지막 답사코스로 조선의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가 잠들어 있는 영릉에 도착했다.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446)를 합장한 무덤이다.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를 따랐다. 1446년(세종 28)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죽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의 서쪽 산줄기에 쌍실을 갖춘 능이 조성되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이고, 서쪽 방은 세종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하여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 때 영릉의 터가 좋지 않다 하여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나왔고, 1469년(예종 1) 현 위치로 옮겼다. 옛 영릉에 있던 상석·장명등·망주석·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하였다.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설치되었으며,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으며, 난간석에 12지신 상을 조각하는 대신 12지를 문자로 표현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 또 하나의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왕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1618∼1674)의 무덤이다. 능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최초의 형태인데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처음엔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의 태조 무덤인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샐 염려가 있다 하여 1673년(현종 14) 세종의 무덤인 영릉(英陵) 동쪽으로 능을 옮겼다. 왕릉 바깥쪽으로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동자석(童子石;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세조 때부터 시작된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부터 다시 출현하였으나 영릉(寧陵)에서 다시 사라져 왕릉 배치에 있어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이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다. 능원 아래에는 정자각·비각·홍살문·재실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금천(禁川)이 흐른다.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의 경계를 상징한다. 오후 4시 30분경, 사단법인 철우회원들은 영릉 입구의 파란 잔디밭에서 유적지 답사 기념사진 촬영을 끝으로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회원들은 유적지 답사를 통하여 영원한 철도맨, 선후배의 끈끈한 情과 義理가 살아있음을 다시금 절감했다. 일생 국가와 철도를 위해 살아온 자긍심을 가슴에 새김질하며 2014 유적지 답사의 여정을 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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